2013/11/04 03:04

어떤 선생



중학교 때 3년 내내 날 가르쳤던 수학선생이 생각난다. 그는 학급을 분할통치했다. 절반은 '공부를 포기한 학생'이었다. 그들은 수학시간이면 선생이 들어오기 전에 책상을 옮겨 열을 맞추고 엎드려 수면을 취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떠들거나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그냥 맞았다. 절반은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이었고 그의 교육 대상은 그들 뿐이었다. 

그의 수업방식은 주입식의 정석 같은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수업시간에 들어와 칠판에다 근의 공식을 증명해놓고 이거 10번 반복해서 쓰고 외워! 하고는 담배를 피러 나가곤 했다. 그러다 한 과가 끝나면 번호나 줄로 학생들을 불러 칠판에 연습문제를 풀도록 했고 풀지 못하면 오리걸음으로 교실을 수십바퀴 돌거나 맞았다. 숙제를 안해오거나 교실에 먼지가 날리거나 어찌됐든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무언가가 발생하면 우리는 집단으로 체벌했는데, 그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았다. 우리는 다같이 일어나 스스로 뺨을 때리거나 이마빡을 주먹으로 때렸다. 스스로 때리면 살살 때리지 않느냐 궁금할 수 있을텐데 그것은 간단히 해결된다. 학기 초거나, 군기가 풀릴 때 쯤이면 그는 시범으로 살살 때리는 것 처럼 보이는 학생을 직접 때려서 시범을 보였다. 그러면 나머지 아이들도, 눈물 쏙 빠지게 스스로 세게 쳐야 했다. 물론 3학년 쯤 되면 소리도 크게 나고 뺨도 뻘개지고 엄청 세게 때리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닥 아프지 않은 기술을 터득할 수도 있는데, 문제는 당신 성적이 좋지 않으면 그것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에게 학생의 싸대기를 때린다는건 그가 하루에도 몇갑씩 피우는 담배 한개피를 꺼내는 것 정도의 가벼운, 어떤 망설임도 없는 것이었다.

그의 수업시간에 떠든다는건 거의 자살행위였기에 수학시간은 언제나 고요햇다. 칠판이 깨끗하지 않으면 그는 분필가루 날리는 칠판지우개로 주번의 뺨을 때렸기에 교실은 청결할 수 밖에 없었다. 숙제를 안해온 학생이 적거나 소위 문제아들이 포함돼있으면 체벌은 거세졌다. 엎드려 뻗쳐를 시켜놓고 몽둥이로 두드려 패는 것이다. 자기가 싫어하는 학생이 걸릴 경우 그는 작정하고 손수 팼다. 가끔은 깍지를 낀 상태로 뻗쳐를 시키거나 원산폭격을 시켰는데 그 아래 압정을 놓고 수시간 두거나 쓰러지는 학생을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그는 길가다가 담배피는 학생이 보이면 싸대기를 날렸고 심지어 출근하는 차에서 등교길에 무단횡단하는 학생을 보고 길 한가운데에서 두드려 팼다는 얘기도 들었다. 학교엔 그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이 넘쳤다. 우리 엄마는 내가 졸업한 후에 산에 등산하러 갔다가 거기에 소풍온 다른학교 중학생들이 그의 이름을 욕하는 것을 들었다고 내게 말한적이 있었다. 

그는 수학에 대해 직접 설명하는건 많지 않았지만 교탁에 걸터 앉아서 이해찬을 욕한다거나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설교를 늘어놓는 적은 종종 있었다. 그가 가르친 수학공식은 잘 기억 안나지만 그가 이해찬에 대해 했던 욕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땐 이해찬이 누군지 잘 몰랐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정치적 지향을 대충 알 수 있겠다. 

그는 공평하지 않았다. 학생들에 대한 판단기준은 성적이었다. 나는 그와 사적인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학창시절에 나는 선생들과 친하지 않았고 살갑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은 문제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나를 총애했는데 그것은 내가 그의 시험에서 가장 좋은 점수를 맞는 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뿐이었다. 그는 몽둥이를 들고 학생들을 팰 때 내게 몽둥이를 가져오도록 시켰다.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중에 내가 섞여 있으면 화를 내지 않고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 그가 풀이과정을 설명하기 귀찮을 때는 내게 대신 나와서 풀라고 시켰고 내가 학교 규정을 넘겨 머리를 길러도 다른 학생들에게 하듯이 바리깡으로 내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지 않았었다. 그는 내게 특권을 베푸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옆에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린 학생이 있어도 나한테는 머리좀 깎으라며 부드럽게 핀잔을 주고 지나가는 식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공부만 잘 하면 다 용서할 수 있다는 그의 가르침 같은 것이었을게다. 나는 그를 좋아한 적이 없었고 불만이 많았지만 비겁하게도 저항하지 않고 조용히 특권을 누렸다. 아마도 성적이 좋은 몇몇 학생들은 그 특권을 조금씩 나눠 받았고 그 학생들은 그의 방식 덕분에 좋은 학교에 갔을지도 모르고 그의 방식을 옹호하면서 그 시절을 어느정도 긴장이 흘렀던 훈육의 시간으로 추억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 시간을 즐겁게 추억하지 않는다.

그가 한 '주입식 교육'이 바람직한 교육인지 모르겠다. 그것은 성적이 낮은 학생이 점수를 올리는 효과적인 방식이었을수는 있겠다. 맞는것에 대한 공포와 낙오되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가 우리의 학습 동기였다. 몇몇 학생들은 그 덕분에 수학성적이 올랐을 수 있고 좋은 학교에 갔을 수도 있으며 좋은 직장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안정된 삶을 꾸리고 그들의 자식들도 부족함 없이 자라났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절대 좋은 선생이라 부를 수는 없다. 누가 그를 좋은 선생이라 부른다면 나는 단호히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는 꽤 좋은 월급을 받았을테지만 옷은 남루하게 입었다. 교실에서 방구를 뿡뿡 껴댈만큼 허례허식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할 수 있고 그렇게 믿었을 수도 있다. 그가 학생들을 위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려치는 몽둥이에서, 그가 날리는 싸대기에선 그런건 느끼지 못했다. 우리들은 모두 그를 욕했다.

그가 생각나는 건 박정희를 추모하는 예배 때문이었다. 모든 죽은 것들은 추모될 수 있고 그건 박정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의 시절을 좋았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그건 그 시절 고통받은 사람들과, 숨죽이고 살아온 사람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는 그에게 위협이 되는 이들을 고문하고 죽이기도 했다. 그는 그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고통을 줬고 공포로 위협했다. 누구든 그에게 맞서면 철저히 짓밟았다. 그렇게 스러지는 사람들을 보며 누군가는 신발끈을 조이고 숨죽이고 치열한 일터로 향했다.

그 시절이 호시절이었던 사람이 있을게다. 그 시절을 통해 삶이 나아진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의 방식 때문에 경제가 성장했을 수도 있다. 경제가 성장하는게 좋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 덕분에 우리는 좀더 편하고 넉넉한 삶을 살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방식이라고, 좋은 시절이라고 추억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희생과 고통을 밟고 이뤄낸 열매를 우리는 즐겁게 따먹을 수 있는 것일까.

덧글

  • 2013/11/09 00:1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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