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05 17:55

엇갈리는 정체성



# 서경식의 생각

"한국작가회의가 예전의 ‘민족문학작가회의’를 계승한 단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고, 이 단체에 모인 작가들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수행한 역할에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2006년 봄부터 2년간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나는 이 단체가 내게 말을 걸어와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냥 일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나로서는 좀 씁쓸한 기분이었다. 내가 ‘민족’의 일원으로서도, ‘작가’로서도 국내 작가들한테서 승인받지 못한 증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첫사랑의 상대로부터 무시당하고 그게 짝사랑이었을 뿐임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나는 ‘한국문학’이라는 말이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에서 유통되는 문학’이라는 극히 한정된, 평범한 의미밖에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문학’이란 말은 오히려 ‘민족문학’이라는 말보다 협소한 개념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묻고 싶은데,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이전의 문학은 ‘한국문학’인가? 고인이 된 작가나 월북 작가, 디아스포라(이산민) 작가도 거기에 포함되는 것인가? 재일조선인의 시나 소설은 ‘한국문학’인가, 아니면 ‘일본문학’인가?"

"윤동주의 작품이 우리 민족이 근대 이후에 경험한 식민지지배, 분단, 이산이라는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역사를 살아온 우리의 고뇌와 동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건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한국’이라는 일국의 틀을 벗어난 ‘민족문학’이라 부르는 편이 적절하다. 근대 이후 조선민족의 이런 경험에 바탕을 둔 문학을 폭넓게 시야에 넣는다는 의미에서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시 ‘민족문학’이라는 말이 담지했던 보편성 지향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건 아니며, 더구나 ‘한국’이라는 일국으로 수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서도 안 된다.

"조선민족이 근대 이후 겪었던 식민지 지배, 분단, 이산이라는 경험은 20세기 이후의 전 인류적 경험이 집약된 것이다. 이런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날의 인간해방 과제를 추구해 간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세계적 보편성을 띠게 마련이다. ‘조선민족 삶의 현장’은 ‘한국’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이북에도 중국, 일본, 미국, 중앙아시아, 그 밖의 땅에도 조선민족 성원들이 이산돼 있다. 이 이산 조선인들의 문학은 좁은 의미의 ‘한국문학’이 아니다."

"나는 내가 쓴 작품이 ‘한국문학’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민족문학’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내가 여기서 쓰고 있는 ‘민족’이라는 말이 이미 사용 기한이 지난, 폐해가 많은 것이라면 현재적 의미의 ‘우리’에 해당하는 다른 개념을 찾아서, 곧 새로운 시대인식의 공유를 추구하면서 더욱 고민해야 할 것이다. ‘민족문학’을 통해 앞으로 전진해야 하며, ‘한국문학’ 쪽으로 후퇴해서는 안 된다."

좁은 틀에 갇힌 ‘한국문학’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50955.html


# 김연수 그리고 겐게쯔(현월)

<그늘의 집>으로 2000년 아꾸따가와 상을 수상한 겐게쯔는 한국에서는 일본식 발음이 아니라 한글식 발음, 즉 '현월'로 소개됐다. 왜냐하면 그는 '자이니찌', 즉 재일한국인 2세이기 때문이다. 그를 만난 것은 지난 2002년이었다. 한민족 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논하는, 상당히 묵직한 자리였다. 역시 '피의 부름'을 받고 많은 재외한국인 작가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겐게쯔에게 '한민족 문학'이라는, 도무지 나로서는 '저항적 민족주의'보다도 더 납득할 수 없는 괴상망측한 신조어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주최측은 당신을 비롯해 외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한국 핏줄의 작가들을 한민족 문학으로 보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국사람들은 현월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더 좋아하는, 하지만 정확한 이름은 어디까지나 겐게쯔인 그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당연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은 개인적인 문학을 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 개인이라는 건 어떨 때는 한국인, 어떨 때는 일본인, 어떨 때는 자이니찌로 지내는 존재인데, 겐게쯔는 그것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은 충분하다고 대답했다. 이런 유동하는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한민족 문학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그로부터 일년 뒤, 겐게쯔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지난번 행사가 끝나고 아내와 함께 목포에서 제주까지 여객선을 타고 여행한 느낌에 대해 말했다. 그는 배를 타고 다도해를 빠져나가며 밀항을 시도하던 젊은 아버지를 상상했다고 한다. 그건 아마도 내가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 일본하고도 나고야하고도 타지미하고도 카사하라까지 찾아갔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 것 같았다. 그건 내 유동하는 정체성의 근원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찾아간 곳에서 아버지의 고향이 거기이니 너는 범일본 문학에 속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내가 얼마나 놀랐을까. 한민족 문학의 위상을 되짚어보는 자리에 초청받았던 겐게쯔 역시 그만큼 놀랐을 것이다. 


내 리얼리티는 민족주의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아스트리드(한국계 스웨덴 작가)나 겐게쯔의 리얼리티를 닮았다. 핏줄로 구성되는 리얼리티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가 핏줄을 얘기할 때, 그건 그들과 나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설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문학은 민족문학이다"라는 명제는 "한국 문학은 국가문학이다"라는 명제처럼 들린다. 민족문학을 통해 우리는 민족공동체의 경험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다른 민족의 경험은 배타적으로 거부했다. 

<여행할 권리>, '내 피를 물만큼이나 묽게 만들지 않으면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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