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6/08 20:05

상실, 상실, 극복 여행 중 단상

- 32만원정도를 잃어버렸다. 105달러정도의 미화, 5만원짜리 한장, 네팔루피 1200루피, 그리고 인도루피 7000가량. 가지가지 잃어버린 셈이다. 인도 지하철 카드와 시티은행 카드도 함께 날아간건 내겐 불편이다. 컴퓨터, 외장하드, 카메라, 여권 등, 내가 갖고 있는 것중에 잃어버리면 큰 상실감을 줄 것들에 비하면 얼굴없는 돈을 잃어버린건 다행인 편이다. 게다가 나는 지갑을 잃어버리기 한시간 전, 지갑에 있던 두둑한 돈 중 무려 13000루피를 가방 속주머니로 빼놨다. 26만원을 벌었다. 덜 잃었다. 

- 그래도 내 삶의 소비수준을 아는 이들이라면 내게 있어 32만원이 준 상실감이 어느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여행을 하면서 계속해서 분실이 발생하는 나에 대한 신뢰도 하락도 큰 타격이다. 단돈 10루피를 아끼려고 흘렸던 땀, 걸었던 시간, 고민하고 비교하던 시간들이 떠올라서 슬펐다. 

- 어제는 방에 처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내 컴퓨터 어딘가에서 얼마전 발견한 옛 게임에 몰두했다. 새벽이 깊어질때까지 무의미한 게임을 하다가 잠들었고 아침에 일어나면서 삭제했다. 조조전이라는 게임, 고등학교 시절에 했었고 대학교 1학년 중간고사를 망치게 했던 게임, 이 게임에 내가 부여할 수 있느 의미는 한정된 조건에서 도출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하는 습관을 길러준다는 정도이다. 이건 굳이 멋지게 합리화를 한것 뿐만은 아니고, 실제로 게임이 개인의 능력에 가져다 주는 선물같은 것이다. 물론 동전의 양면처럼 딸려오는 숱한 부작용과 함께 선물은 포장돼 있다. 내게 있어 합리적 행동의 판단 연습은 무조건적으로 추구할 대상이 아니게 됐고, 조조전이 아니더라도 숱하게 연습할 수 있다. 가령, 여행할 때 돈의 위치를 더 신중히 선택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여행은 저장과 불러오기가 안된다는 점에서 조조전과 감히 비교할 수 없다.

- 쓸데 없이 나의 행동들을 이런 저런 말들로 포장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노라면, 내 상실감이 크다는게 느껴진다.

- 아침에 배가 출출해 빈물통을 들고 거리로 나갔을때, 망고를 살때 10루피를 흥정하고 있는 나를 보며, 10루피짜리 사탕수수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나를 보며, 커드 500그람을 사며 1.6을 곱하며 네팔과 인도의 커드값이 거의 같다는 계산을 하는 나를 보며 어제 16000루피를 잃어버린게 상기되면서 내 모습이, 내가 내는 돈의 감각이 3인칭으로 보였다. 즉,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직 꿈에서 깨지 않은 듯한, 혹은 않았으면 하는 듯한 기분으로 거리를 털썩털썩 걸었다. 15000루피와 10루피의 간극을 느끼며. 

- 어젯밤과 오늘 아침 했던 여러가지 생각중에 날 제일 위안했던 생각은 어쨌든 소비와 분실은 다르다는것이었다. 내가 여행중에 돈을 아끼는건 단순히 적은 돈을 쓰기 위해서는 아니었지 않은가. 하루 5천원에 살 수 있어요! 너희도 그렇게 해! 이런게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소비의 방식을 바꿔가며 불필요한 사치감과 욕심을 줄여가며 현지인의 어떤 수준에 맞춰서, 그 물가감각에서 사회를 바라보려는 노력이 아니었나. 그러니까 내 돈 씀씀이는 소비주의에 대한, 사회의 돈에 대한 어떤 태도이자 시각의 문제였다. 그런 면에서 분실한건 돈을 써버린 것과는 다르다고 스스로를 위무했다. 돈을 잃어버렸을 때 그 반작용으로 이렇게 잃어버릴 바에 차라리 펑펑 쓸걸. 참지 말걸, 하는 생각들이 드는데 위의 관점으로 생각해보면 그 아쉬움이 조금 가신다. 중요한건 내 태도와 시각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그것은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 물론 돈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짓눌려 그 태도와 시각을 잃는다면, 위험하다. 그리고 여행을 계속해서 할 때 이러한 잃어버림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다. 아, 그리고 태도와 시각, 이것은 비단 여행의 문제만은 아니라 삶의 문제이기도 하다.

- 일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만약 순서가 뒤바뀌어서 내가 30만원을 잃어버렸다가 일이 생겼더라면, 나는 이 사건들을 전화위복이라든가, 보상이라든가, 신의 선물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일을 먼저 구하고 돈을 잃어버린것과 돈을 잃어버리고 일을 구하는것은 결과적으로 같지만 기분상으로는 후자가 전혀 반대지 않을까. 뒤바꾸어 생각해보려 해도, 스스로에게 그런 심리 조작은 불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어찌 됐든 일이 있기에 나는 위안을 삼고, 계속해서 델리에 머물 수 있다. 안그랬으면 바로 귀국했을지도 모른다. 상실감에 의해서거나, 혹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서 말이다.

- 일을 어느정도 세팅해놓고 6월 말에 짧게 레에 갔다오려 했었다. 하지만 어제 돈을 잃어버리고 집에 오는길에 그 계획을 접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레는, 내게 남아 있는 얼마안되는 여행의 환타지로서의 장소이지만 과감히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한건 스스로에 대한 어떤 벌로써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돈의 상실을 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보상받고 싶었다. 누군가 나타나서 내게 갑자기 30만원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친한 사람들의 동정과 애착을 받고 싶기도 했다. 관계로 보상받고 싶었지만, 결핍에 대한 보상으로 인한 관계는 만족스럽지도, 좋은 결말이 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안다. 여행을 접고 대신 영어나 힌디공부를 독하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게 있어 언어공부는, 물적조건을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는게 새삼 느껴졌다. 

- 아, 분석은 대개의 경우 나를 위안한다. 나중에 이 글을 보고 그래, 30만원은 별거 아니었어 하는 생각을 하길 바란다. 이 여름에 내가 델리에서 쏟아낼 땀은 또 내 삶을 살찌울 것이다. 

- 인 샬라


- 이 글은 한번 날렸다. 불안정한 인터넷 탓인지 한걸음에 쓰고 글저장을 눌렀는데 이글루스가 먹어버렸다. 기억을 되살려 쓰지만 첫 글이 더 깔끔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력감에 시달리기 싫어 꾸역꾸역 다시 쓰고 올린다. 글의 제목도 그래서 상실을 한번 더 넣었다.

덧글

  • 낮ㅏ 2013/06/09 16:13 # 답글

    아이고오.. 알이즈웰 ㅜㅜ
  • Jerome 2016/08/07 04:26 # 삭제 답글

    제 개인적인 의견을 말씀드리면,(지금 러시아 여행중인데 일주일전600불을 러시아경찰이 훔쳐갔습니다. 아무튼 저도 지금 패닉상태입니다).
    현금을 많이소지하는건 별로좋지 않은것습니다.
    원화에 대한 달러환율이 좋은것을 확인하고 조지아에서 불필요하게 많은 달러를 인출한게 실수였지요. 어디든 돈냄새를 잘맡는 이들이 있는것같아요.

    가진게 없고 잃어버릴게 많지않으면 그만큼 충격도 덜할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atm수수료는 정말 미미한 금액인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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